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59년 루산회의 (문단 편집) == 결과 == 1959년 8월 16일에 8기 8중전회가 끝났다. 회의는 <펑더화이 동지를 두목으로 하는 반당집단의 착오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키고, 펑더화이, 황커청, 장원톈, 저우샤오저우를 직무에서 해임시키고 그들의 당내 직무를 보류시켰다. 펑더화이는 국방부장, 중군위 부주석, 황커청은 총참모장 겸 서기처 서기, 장원톈은 외교부 부부장, 저우샤오저우는 호남성 제1서기에서 해직당했다. 국방부 부부장 리다(李达)와 샤오커(萧克)도 해임당했다. 후임으로 린뱌오가 국방부장 겸 중군위 제1부주석, 총참모장 겸 중군위 비서장에 공안부장 뤄루이칭, 후임 공안부장에 셰푸즈가 임명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8월 18일 ~ 9월 12일, 중군위 확대회의, 8월 24일, 전국외사회의, 1959년 9월 17일, 중화인민공화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9차 회의에서 잇달아 비준되었다. 후임 호남성 서기로는 저우샤오저우를 비판하고 마오쩌둥에 대한 충성을 확인한 [[화궈펑]]이 선출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9월 17일에야 국방부장에 새로 린뱌오가 임명되었다는 것이 발표되면서 조금 공개되었을 뿐이었는데, 이는 흐루쇼프의 미국 방문에 맞춰서 내놓은 것으로 소련을 겨냥한 것이었다. 또한 회의는 <당의 총노선을 보위하고 우경기회주의를 반대하기 위한 투쟁>이라는 문건을 통과시키고 우경기회주의의 공격을 격퇴하는 것이 당의 주요 전투 임무가 되었다고 선포했다. 9월 9일, 마오쩌둥은 전국외사회의, 중앙군사위원회 합동회의에서 "절대로 조국에 등을 돌리고, 외국과 내통해서는 안된다. 중국공산당원이 외국의 당조직을 파괴해서도 안되며. 동시에 당중앙을 배반하고 외국의 도발을 받아들여서도 안된다."라고 하면서 가오강 사건을 언급하며 펑더화이와 흐루쇼프가 내통했다는 의심을 드러내었다. 반우경 투쟁은 강화되어 당원의 3%가 중점비판대상, 4.4%가 방조 비판대상이 되었고, 9.3%의 시, 국장 급 이상 간부들이 적발, 비판당했다. 대약진운동은 계속 가속화되었다. 당연히 대약진운동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펑더화이는 1962년의 조사 책임자로 임명되어 조사 결과인 '팔만언서'를 제출함으로 자신의 비판이 정확했음을 증명했다. 하지만 군의 새 수장이 된 린뱌오는 펑더화이의 복권에 반대했고 마오 역시 펑더화이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이로 인해 중국공산당의 제도적 규범과 위신은 더욱 흔들리게 되었고, 이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